▶문헌속의 무궁화 .. ▶무궁화의 수난사 .. ▶무궁화 수호
 


인류의 역사에 민족의 이름으로 특정 식물이 가혹한 수난을 겪은 일은 우리나라의 나라꽃인 무궁화가 유일한 것이다. 무궁화는 민족의 역사와 함께 겨레의 맥락 속에 숨쉬어 온 꽃이기에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에는 민족의 수난과 함께 피폐(疲弊)되고 빼앗겨 버리는 참혹한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만주, 상해, 미국, 구라파로 떠난 독립지사들이 광복 구국정신의 표상(表象)으로 무궁화 를 내세우자 일본은 여기에 당황한 나머지 무궁화를 보는 대로 있는 대로 불태워 버리고 뽑아 없애 버렸다.

일제는 나라꽃 무궁화를 '눈에 피꽃'이라 하여 보기만 해도 눈에 핏발이 선다는 거짓 선전하였으며, '부스럼 꽃'이라 하여 손에 닿기만 해도 부스럼이 생긴다고 하는 등 갖은 말로 우리 민족의 기개(氣槪)를 표현하는 무궁화 탄압에 극악(極惡)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라꽃 무궁화에 관한 수난이 가중되면 될수록 우리민족은 더욱 우리의 정신을 대변하는 무궁화를 사랑하고 숨겨 가면서까지 지켜왔다.

일제의 무궁화 탄압속에 굳은 의지로 무궁화의 민족얼을 심어주고 재인식시키기에 앞장섰던 인물로 우호익(禹浩翊)과 남궁 억(南宮 檍)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오호익은 우리 나라 말과 글이 일제의 쇄사슬에 묶여 있던 암흑기에 무궁화를 학문적 차원에서 깊이 있게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무궁화의 사적가치(史的價値)를 고찰하였고 조선의 국화(國花)로 숭배하게 된 유래를 논증(論證)해 보임으로써 나라꽃 무궁화로서 의 위상(位相)을 정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한서 남궁 억은 무궁화 말살(抹殺)을 위해 광분하는 일제의 눈을 피해 무궁화 묘목을 길러 전국에 나눠 주고 무궁화 자라는 것을 지켜보면서 식어가고 꺼져 가는 구국혼 (救國魂)을 불러 일으키는 데 선봉적 역할을 하였다.

우리 나라꽃으로 우리 민족과 함께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 했던 무궁화는 또 다시 치욕스런 수난을 당하는데 그게 바로 동아일보에 연재(連載)됐던 국화논쟁(國花論爭) 이었다.

이제 다시금 무궁화의 수난을 되새겨 보고 무궁화의 진가(眞價)를 평가함으로 나라꽃으로서의 무궁화 자리를 바로잡아야 한다.

무궁화 수난

무궁화 시련


일제의 문화 말살은 마침내 우리겨레의 꽃 무궁화 말살에까지 이르렀다. 우리나라를 상징해 주는 태극기를 전국적으로 압수(押收)하여 없애 버렸던 일본 제국주의는 국기 다음가는 민족상징인 나라꽃, 즉 무궁화를 없애는 작업에 착수(着手)하였다.

우리 나라가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제정한 일이 법적(法的)으로는 없었지만 온 국민은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굳게 믿어 왔었다.

'삼천리 반도'라는 단어 위에는 반드시 덧붙여져 '무궁화 삼천리'로 일컬어지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조상 대대로 사랑하고 지켜 온 무궁화를 잃어 버린 조국을 사랑 하듯 애지중지(愛之重之)하며, 무궁화로부터 졌다가 다시 피어나는 굳센 의지를 배워, 우리도 언젠가는 기어이 독립하리라고 결심하고 뿔뿔이 흩어지는 겨레의 마음속에서 무궁화를 가꾸면서 독립정신을 키워 나갔다.

이와 같은 우리의 민족성을 감지(感知)한 일제는 나라꽃에 대한 악전선에 혈안(血眼)이 되어 있었다.
이것 역시 민족의식 말살정책의 전초(前哨)적인 작업으로 나라꽃 무궁화 를 '눈병나는 꽃(눈에 피꽃)'이라고 하며 가까이 가지도 말라고 했고 '부스럼 꽃'이라며 무궁화의 꽃가루가 살갗에 닿으면 부스럼이 생긴다는 등 무궁화를 왜곡(歪曲), 날조 (捏造)하기에 광분(狂奔)하였으며 무궁화 말살정책을 위한 터무니 없는 술책(術策)과 계교(計巧)를 예사로 자행했다.

이리하여 이른바 무궁화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니 이것이 곧 국화말살(國花抹殺) 정책이다.

일제의 나라꽃 무궁화에 대한 잔악무도한 말살정책은 《조선총독부 고등경찰서전》에 잘 나타나 있다.
무궁화는 조선의 대표적 꽃으로서 2천여 년 전 중국에서 인정된 문헌이 있다. 고려조시대에는 온 국민으로부터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으며, 문학상, 의학상에 진중 (珍重)한 대우를 받았는데, 일본의 사쿠라, 영국의 장미처럼 국화로 되어 있다가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서서 이화(李花)가 왕실화로 되면서 무궁화는 점차로 세력을 잃고 조선 민족으로부터 차차 소원해진 것이다.

20세기의 신문명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부터 유지(有志)들은 민족사상의 고취와 국민정신의 통일 진작을 위하여, 글과 말로, 천자만홍(千紫萬紅)의 모든 꽃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으로 그 수명이 잠깐이지만 무궁화만은 여름에서 가을에 거쳐서 3∼4개월을 연속 필 뿐 아니라 그 고결함은 위인 (偉人)의 풍모라고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궁화강산' 운운하는 것은 자존 (自尊)된 조선의 별칭인데, 대정(大正)8년 기미운동(3.1운동을 말함) 이래 일반에게 널리 호용(呼用)되었으며, 주로 불온(不穩)의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근화(槿花), 무궁화, 근역(槿域)등은 모두 불온한 문구로 쓰고 있는 것이다.

《조선총독부 고등경찰사전》의 규정은 곧 무궁화 말살 책동의 근거가 되며 지시가 되고 법이 되었다.
이러한 악전선은 곧 한반도 식민정책의 적극적인 정책으로, 비록 한 그루의 꽃나무에 불과한 무궁화이지만 여기에는 민족단결의 근거를 만들 수 있는 소지(素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의 무궁화 말살 사건

<동아일보와 무궁화>

3·1운동 후 새로 부임한 사이토 총독은 헌병경찰 통치를 지양(止揚)하고 한국인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겠다는 기만정책(欺瞞政策)을 표방(標榜) 하였다.

통치방법이 표면적으로나마 유화되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민족언론으로서 의 기치(旗幟)를 내걸고 창간됐다. 《동아일보》창간호는 <主旨(주지)를 宣明(선명)하노라>는 제목으로 창간사를 실었는데 그 서두는 다음과 같다.

蒼天 (창천)에 太陽(태양)이 빗나고 大地(대지)에 淸風(청풍)l 불도다. 山靜受流(산정수 류)하며 草木昌茂(초목창무)하며, 白花爛發(백화난발)하며, 鳶飛魚躍(연비어약)하니 充滿(충만)하도다. 東方亞細亞(동방아세아) 無窮花(무궁화)동산 속에 二千萬朝鮮民衆 (이천만조선민중)은 一大光明(일대광명)을 見(견)하노라. 空氣(공기)를 呼吸(호흡)하도다 아 實(실)노 살았도다. 復活(부활)하도다. 장차 渾身(혼신)勇力(용력)을 奮發(분발)하야 멀고 큰 道程(도정)을 그 일흠이 무엇이뇨. 自由(자유)와 發達(발달)이로다.
이처럼 조선은 곧 무궁화 동산이라 표현하며 큰포부를 밝히고 있다.
이와 함께 제호도안(題號圖案)도 '동아일보' 넉자의 장방형 둘레띠를 무궁화로 하였다.

《동아일보》는 1923년부터 10년에 걸쳐 매년 무궁화 사진을 게재(揭載)하였다. 1923년 8월 18일자 신문의 사회면 상단(上端)에 3단 14㎝ 크기의 무궁화 사진과 '비 개인 아침에 새로 단장한 무궁화'라는 사진 설명을 실었다.

그 후 1926년 8월 20일자에 '무궁화는 잘도 핀다',
1928년 8월 12일자에 '무궁화는 제철 만나',
1931년 8월 26일자에 '철 지난 무궁화',
1935년 8월 30일자에 '사는 데 애착심을 가진 무궁화'라는 제목으로 무궁화 사진만을 게재하였다.

이는 무궁화를 통해 민족 정신을 더욱 고취하려는 것으로 무언(無言)의 은밀한 저항정신의 표시였다.

1930년 1월 1일에 《동아일보》는 창간 당시의 제호도안을 바꿨다. 예서(隸書)로 쓴 '東亞日報(동아일보)' 넉자의 바탕을 한반도 지도와 무궁화로 메운 도안이었다. 현재의 동아일보 제호와 같은 모습이다.

1935년 4월 21일자 <세계 각국의 국화(國花)>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 도안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1938년에 이르러 제호의 무궁화 도안이 검열에 걸렸다. 그래서 1938년 2월 9일자 신문으로부터 한반도와 무궁화 그림이 삭제되고 그 자리를 가로줄로 메운 제호(題號) 가 실렸다.

현재의 《동아일보》제호는 1945년 광복후, 신문의 중간(重刊)과 함께 환원 (還元)된 것이다.

〈조선소년군·중앙학교의 무궁화 도안 탄압〉

무궁화는 민족정신의 표상(表象)이었다. 당시 학교나 단체에서는 이 의미를 살려 무궁화 그림을 삽입한 상징
물을 만들어 썼다. 물론 이 상징물은 일제의 단속에 걸렸고 압수되었다.
1922년 조철호(趙喆鎬)는 민족의 독립을 성취해 낼 재목(材木)을 양성(養成)하겠다는 뜻을 갖고, '조선소년군'을 창설하였다.

조선소년군은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큰행사 가 있을 때에는 , 장내 정리를 위하여 파견되고는 하였다.

1937년 7월 31일 종로 파고다공원에서 시국강연회(時局講演會)가 열렸을 때에도 조선 소년군이 강연장의 정리를 맡았다. 이때 조선소년군이 항건(項巾) 한구석에 염색되어 있는 휘장(徽章)이 문제가 되었다. 무궁화 화환 안에 태극 마크와 'ㅈㅜㄴㅂㅣ'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휘장이었다.

그날로 조선소년군의 모든 항건이 압수되고 조선소년 군 간부들이 구금(拘禁)되었다. 태극, 한글표어, 무궁화가 모두 민족정신의 표시(表示) 이며 일본에 항거(抗拒)하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후 조선소년군의 훈련 교과서인 교볌까지 압수되고 집회, 하이킹, 야영등에도 고등계 형사들이 따라가 감시를 하였다.

〈중앙학교의 모표〉

중앙학교(中央學校)의 모표(帽標)도 '中央'의 中자를 무궁화 화환이 두른 것이었다. 조선소년군의 휘장처럼 이모포도 단속에 걸려 사용을 금지당했다. 그래서 무궁화 화환 대신 6각형 테두리를 새겨 달다가, 1939년 5월부터는 월계환(月桂環)을 둘러 사용하였다.

이 학교는 모표뿐아니라 교가(校歌)도 문제시 되었다. 일제는 '흰 뫼와 한 가람은 무궁화 복판'이라는 구절을 문제삼아 마침내 교가 부르는 것을 금지했다.

일제가 이처럼 무궁화를 불온시한 것은 무궁화에 깃들어 있는 민족얼을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력한 단속(團束)하에서도 무궁화는 민족의 가슴에서 끊임없이 피어났다.

〈고려대학교와 무궁화 기둥〉
1934년에 준공된 고려대학 본관 정문에 두 개의 돌기둥이 서 있다. 이것이 고려대학 의 전신인 보성전문(普成專門)의 정문이었는데, 전면에는 호랑이가, 후면에는 무궁화가 조각되어 있다. 무궁화 조각이 돌기둥 후면에 조각되어 있어서 일본 경찰의 눈에 띄지 않고 수난을 면하여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근화여학교의 교복〉

서울에 근화(槿花) 여학교가 있는데 , 교복으로 초록빛 바탕에 보랏빛 줄무늬가 있는 치마를 입었었다. 물론 무궁화의 푸른 잎과 보랏빛 꽃을 상징적으로 디자인한 것이었 다. 학교의 이름부터가 근화였으니 일제의 탄압은 더욱더 가중되었다.

〈오산학교 무궁화 동산 사건〉

남강 이승훈이 세우고 고당 조만식이 교장으로 있던 오산학교 이두 민족 지도자의 영향을 받아 독립의 기개가 학생들 모두에게 한껏 부풀어 곳이었다.

항간에 전해지는 애기로는 오산학교의 고정에도 민족 독립의지의 표상인 무궁화가 곱게 피어 있는 무궁화의 동산이 있었는데 이때 일제가 오산학교의 무궁화 동산을 자진 철거토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학교당국과 학생들이 이에 불응하자 일제는 강제로 무궁화동산을 철거하고 불태우며 짓밟았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이 결연히 일어나 일제 의 탄압과 횡포에 항거하였다.

바로 이것이 '오산학교 무궁화 동산 사건'으로 이후 일제는 그들의 마수를 더욱 뿌리 내려 오산학교의 수업을 못하게 하고 학교를 강제로 휴교하였다 한다. 이내용의 사실여부는 불분명하고 명확한 근거가 없어 더 이상 상술 치 못함이 안타깝다.

〈대구사범 무궁화 동산 사건〉
1928년 대구사범에 다니던 안동지방의 학생들이 민족자본과 자주독립의 일환으로 무궁화 동산 사건을 주동하였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사건의 내용은 어느 논문이나 저술에 한줄 기록됨으로써 세상에 알려 진 것이 아니라, 지난 1982년 2월 3일부터 2월 6일까지 사단법인 한국무궁화선양회가 실시한 제1회 무궁화 선양지도자를 위한 선양 지도연수회에서 당시 서울시 교육감 최열곤의 강의에서 밝힌 내용이다.

오산학교 무궁화 동산 사건과 같이 1928년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무궁화 동산 사건도 좀더 구체적인 내용과 제반자료가 밝혀져야 할 것이다.

이처럼 나라꽃 무궁화는 일제의 압박 밑에 처절한 서러움을 당한 꽃이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나라꽃을 지키려 했던 우리 민족의 무궁화에 대한 뜨거운 애정은 일제의 혹독한 시련속에서도 꺽이지 않고 꿋꿋하게 피어나 그 민족혼을 꽃피울수가 있었다.

무궁화를 단지 관상용 꽃의 하나로 보지 않고 민족의 꽃으로 승화시킨 우리 선인들의 곧은 절개는 오늘날 나라꽃으로서의 무궁화조차 망각하고 사는 현대인을 부끄럽게 한다. 무궁화는 민족의 역사와 함께 겨레의 맥락속에 숨쉬어온 꽃으로 나라꽃 무궁화 로서 삼천리 방방곡곡에 길이길이 꽃피워야 한다.